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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2018/10/31

글/이유경
사람이 좋아 불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평생 끝내지 못할 꿈임을 알지만 문학을 통해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고싶다. ‘인간적인’ 학자를 꿈꾼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누구든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짤막한 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프랑스에 온 뒤였다. ‘차별’이란 단어는 들을 때마다 세 줄의 시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그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 기본적으로 평등한 지위의 집단을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불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특정 집단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는 통제 형태.

수많은 차별 중에서도 내가 ‘인종’ 차별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던 곳은 파리였다. 무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프랑스에서 차별을 느끼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라 생각함 직하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말 그대로 인종이란 기준에 의해 평등하지 못한 대우를 하는 것이고, 한눈에 보이는 것이 피부색이기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프랑스에서의 차별은 당연한 요소일지 모른다. 이유 없이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니하오, 곤니찌와’와 같은 인사말을 놀리듯 하며 지나가는 것, 단체로 달려와 놀라게 하는 일 등 누군가는 그들 중 ‘극히 일부’라고 주장할지 모를 프랑스 내 인종차별은 사실 그들의 ‘무관심’만큼이나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들은 동시에 스스로 인종차별에 대해 돌이켜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할 만큼 인간은 차별을 즐기는가? 오로지 다른 피부색, 나라와 환경에서 기인한 태도인가?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나 또한 누군가를 차별한 적은 없었는가.

그러던 중 인종차별에 대해서만큼은 생각을 재정립하는 경험을 했다. 문제의 날은 필수로 선택해 들어야 했던 영어 강의의 말하기 시험 날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 중 나 혼자 유일한 동양인 학생이라 교수님께선 평소 나를 더 신경 써주셨고, 2인씩 짝지어 진행되는 시험에 앞서 내 이름을 들으며 그 함의를 묻기도 했다. 주어진 과제는 ‘친구와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약속 잡기’. X요일 아침에 시간이 되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Chinese class”가 있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이 불현듯 날 쳐다보며 “You don’t need it, actually”하고 웃으시는 것 아닌가. 순간 벙 찐 나는 조금 전 이름 뜻을 물어봐 주시던 교수님의 모습을 떠올렸고, 표의문자를 가진 중국 이름을 생각했구나 하고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밝혔다. 문제는 그 후였다. 귀까지 빨개진 교수님께서는 내게 미안하단 말을 몇 번이고 하셨다.  외국인 학생과 교수가 많은 파리 7대학에서도 강의하시는 교수님은 “한국인 교수 동료들이 중국 사람이냐는 말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분 나빠했는지 알아서 정말 그 기분 잘 아는데 미안해요.”라고 연신 사과했다.

이상하게도 그 반복되는 사과에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중국 사람이라고 오해해서? 아니다. 도대체 왜 ‘중국 사람’으로 오해받으면 기분이 나빠야 하는가? 객관적으로도 학교 내 학생들 중 압도적인 수는 중국 학생이다. 아니, 프랑스 내 동양인으로 따져도 그럴 것이다. 계속해서 생각했다. 기분이 이상하게 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되짚고 나서 확신했다. 강의 내내 나를 신경 써주셨던 교수님이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Where are you from?” 한 마디 묻지 않았다는 것, 면 대 면으로 시험 보는 당일에도 그 질문의 부재는 여전했다는 것, 이 차가운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확신했다. 내가 교수님이 언급한 한국인 동료들이었다면, 중국 사람이냐는 질문보다 먼저 -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주는 질문을 하지 않은 - 상대방에 서운했을 것이라고.

이 경험이 내게 전한 울림은 하나다. 내 앞에 있는 상대가 어떤 사람임을 미리 단정 짓고, 더 이상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순간 지나치는 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사람일 것이라 확신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일은 없다는 것. 다시 차별의 정의로 돌아가 보자면, 특정 ‘집단’이나 인종을 생각하며 한 ‘개인’을 하나의 성격으로 ‘격리’시키는 것만큼이나 마음 아픈 일은 없다. 한 번의 스침으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놀리는 것만큼이나 한 번의 분류로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 용납되는 것은 불합리하고 슬픈 일이다.

이후 나는 종종 스스로 묻는다. 내가 경험한 ‘어떤’ 나라의 사람이면 다 똑같은 것인지, 질문 한 마디 던지지 않아 상대방에게 무관심이란 무기를 휘두르진 않았는지, 그리고 단정하고 지나쳐버려 상대방의 진면모를 놓치진 않았는지. 어쩌면 내 평생의 친구가, 연인이, 가족이 될지도 모를 그 누군가를 말이다.


‘인종’뿐 아닌 ‘외모’로도, ‘학력’으로도, ‘직업’으로도 상대방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누군가에게,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당신은 그 어떤 기준으로도 정의될 수 없을 한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