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pé82           


« L’enfer, c’est les autres » ? 지옥은 타인인가?





- 시선의 미학 그리고 ‘즉자(卽自)’로서의 타자에 대하여 -

‘알려지지 않은 불문학’을 주제로 뽑아 들었다. 굉장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선택이다. 근 몇 년의 시간을 불문학 공부에 쏟았음에도 불문학은 여전히 나에게 미지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을 택했다. 20세기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의 소설 << 질투 (La Jalousie, 1957) >> 그리고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희곡 << 닫힌 방 (Huis Clos, 1944) >> 이다.
단순한 소설과 희곡이라기에 이 두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소설이지만 영화 같고, 희곡이지만 철학적이다. 실제로 로브그리예는 작가일 뿐 아니라 영화인이기도 하고, 사르트르는 철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 다소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는 두 작품을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각 장르가 가진 특성을 넘어 ‘타인’ - 의 시선과 존재 -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브그리예의 << 질투 >> 속 ‘타인’은 모순적으로 ‘나’, 즉 주인공이다. 누보로망(Nouveau Roman)의 대표적 예시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질투’와 ‘블라인드’라는 이중 의미를 지닌 단어 ‘la jalousie’가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블라인드 틈 사이로 아내와 이웃 남자의 부정을 의심하는 화자의 시선을 다룬다. 화자는 철저히 타인이 되어 자기 자신이나 아내 A..., 이웃 남자 프랑크 중 그 누구의 감정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화자의 고립된 상황은 ‘사물’에 투영된다. 아이를 돌보느라 항상 오지 않는 아내 크리스티안을 두고 매번 화자의 집에 방문하는 이웃 남자 프랑크를 위해 아내 A...는 식탁 위 식기도 세 벌, 테라스 밖 팔걸이 의자도 세 개를 준비한다. 그러나 화자는 늘 그 자리에 없다. 아내와 이웃 남자가 대화하는 내용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상황 묘사는 이런 식이다. “창문 가운데 두 개는 중앙 테라스 쪽으로 나 있다. 오른쪽으로 첫 번째 창문에 드리워진 블라인드의 제일 아래 칸, 경사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두 개의 얇은 나뭇조각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과 그 윗부분이 보인다. A...는 팔걸이 의자에 몸을 세우고 깊숙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녀는 맞은편 골짜기 쪽을 바라본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다. 프랑크는 왼쪽에 있어 보이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있다. 아니면 아주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프랑크의 방문 속에서 화자의 질투는 더욱 심해져 간다. 그러던 중 아내와 프랑크가 시내에 나가 트럭 고장을 이유로 하룻밤이 지나 들어오는 일까지 생긴다.
화자는 질투의 감정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나열한다. “A...는 오래전에 돌아왔어야 한다. 그렇지만 늦을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화자의 블라인드 속 시선, 명확하지 않은 아내와 프랑크의 일, 반복되는 두 사람의 식사를 묘사하며 끝난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식사와 외출을 제외한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것이다. 특정한 서사 없이 마치 카메라가 주인공들을 관찰하는 듯한 형식을 띠고 있는 로브그리예의 누보 로망은 난해한 것만큼이나 참신하다. 그는 그의 세계관을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타인인 남편 ‘화자’의 시선은 어떤가? 아내 A...와 이웃 남자 프랑크는 정말 부정을 저질렀을까? 남은 것은 오로지 단편적인 ‘사실들’과 “어쩌면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현실뿐이다. 사물 하나하나와 인물들의 행동 묘사에 대한 천착, 그 천착만이 화자의 ‘질투’를 증명해주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 ‘타인’의 위치를 다룬다. 닫힌 방은 사르트르가 만들어 낸 일종의 ‘지옥’이라는 점에서 지옥 같은 ‘시선’ 속에 머물러있는 <<질투>> 속 화자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희곡 속에는 가르생, 이네스 그리고 에스텔이라는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창문이나 거울이 없고 책을 읽거나 잠을 자면 안 되는 작은 방, 이 폐쇄적 공간에서 주인공들은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한다. 서로의 삶을 이해시키고 싶어하던 인물들은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진짜 삶’을 숨긴다. 에스텔은 불륜으로 생긴 아기를 살해해 애인 로제를 자살로 몰아넣었고, 아내를 괴롭히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던 가르생은 탈영으로 처형됐다. 이네스 역시 사랑하는 여인과 그의 가정을 파괴했다.
방안에 갇혀 보내는 ‘지옥’의 시간은 끝이 없다. 이 영원성 앞에서 결국 진실은 밝혀지고 등장인물들은 정작 ‘문’이 열렸는데도 문 뒤의 고독함이 두려워 타인의 시선을 얻을 수 있는 방에 있기를 택한다. 이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가르생은 외친다.


가르생 : 내가 비겁한 놈이라고 떠드는 자들이 수천이야. 하지만 수천이 대수야? 하나의 영혼이, 단 하나의 영혼이라도, 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고, 나는 용감하고 결백하다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있게 말해줄 수 있다면, 나는...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 나 좀 믿어 주겠어? 그럼 넌 내게 나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이 될 거야.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서로 이해받지 못한 채 가르생의 대사로 끝을 맺는다.


가르생 :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실존주의의 대가 사르트르의 이론을 통해 본다면 희곡의 결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사르트르는 ‘즉자 (卽自, être-en-moi)’로서 존재하는 사물들과 달리 인간은 ‘대자 (對自, être-en-soi)’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즉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해 ‘본질’이 ‘실존’보다 앞서지만, 인간은 ‘어떤 것에 대해서’ 존재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찾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의 본질은 매 순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형성되며 살아있는 한 규정 불가능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선택의 자유 속에서 인간 번민의 근원을 집어냈다.
<<질투>> 속 타인은 눈에 보이는 객관적 사실들만을 그려낼 수 있었을 뿐이고, <<닫힌 방>> 속 타인은 사실들을 숨겨가며 다른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존재들로 남았다. ‘시선’을 통한 타인의 모습을 감정 표현 하나 없이 나타냈고, ‘타인’ 그 자체로서의 정의를 ‘즉자(卽自)’로 묘사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다시 펼쳐 보지 않을 두 작품을 통해 묻고 싶다. 그렇다면 타인은 정말 지옥인가? 타인의 시선을 통한 ‘나’는 내가 아닌가? 죽을 때까지, 더 나아가 ‘지옥’ 속에서까지 타인에게 규정될지 모르는 우리의 ‘본질’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인가? 단 한 번 ‘방’에서 나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 끝없는 ‘고독’ 속으로 기꺼이 뛰쳐나갈 수 있을까.



20/11/2018
글/이유경
사람이 좋아 불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학작품 내 다양한 군상들을 통해 위로받았다.
평생 끝내지 못할 꿈임을 알지만 문학을 통해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고싶다.‘인간적인’ 학자를 꿈꾼다.
이미지/김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