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pé82           


“그런 일을 겪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




우리네 우여곡절에는 항상 사족이 따라붙는다. 놀라움과 약간의 후회, 때로는 분노. 예상치 못한 타격에 더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들을 누구나 하나씩 품고 있다. 이곳 프랑스에서도 삶이란 굽이치는 것인지 Péripétie 라는 단어에서 ‘근처에서(péri-)’ ‘떨어지다(pétie)’ 가 보인다. 무엇이 떨어지는지는 몰라도 프랑스 유학생들에 유난히 버거운 것이 틀림없다. 나고 자란 땅을 떠나 마주하는 우여곡절은 차곡차곡 쌓여 ‘유학생 썰’이 되고, 절대 마르지 않는 경험담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때쯤 긴 한숨으로 마무리짓곤 한다. 일상에 지뢰처럼 매복된 Péripétie 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최대한 사뿐사뿐 걸었을 테다. 하지만 나를 뒤흔들었던 특정 사건들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왔기에, 유연하게 대처할 스스로에 대한 기대만으로 이방인의 삶을 이어나간다.

오이디푸스의 Peripeteia 그리고 개인의 서사

뜻밖의 행복을 ‘우여곡절’이라 부르지 않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을 무려 2400년 전에 꿰뚫어 보았다. 그는 ‘시학’에서 Peripeteia를 ‘클라이막스로 향하기 위해 전환점이 되는 비극의 요소’로 정의한다. 희곡과 소설, 오늘날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쓰이는 장치가 단지 픽션에서만 통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이 써 내려가는 삶이라는 작품에서는 결말을 알 수 없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말 닥쳐올 재앙에 무력한 비극의 주인공들인 걸까? 우여곡절의 아이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려보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란 신탁을 받았던 오이디푸스는 자신 앞에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던 영웅이다. 테베로 오는 길에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스핑크스를 물리친 후 어머니와 결혼해 왕좌에 오를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그에게 이 모든 사건은 Peripeteia가 아니었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을 작품이 다루듯이, 오이디푸스의 Peripeteia는 그 자신이 신탁을 거역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내가 아버지를 죽였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 그는 두 눈알을 파내고 왕국을 떠난다.

오이디푸스의 Peripeteia, 운명의 터닝포인트는 모든 사건의 경위을 마주했다는 것.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알아차림’의 순간 이전과 이후 지속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달리 말하면, 우여곡절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를 왕으로 만든 영광스러운 발걸음이 죄로서 밝혀지는 순간에 운명은 잔혹한 얼굴로 탈바꿈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새 Peripeteia 를 향해 걷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픽션 밖의 삶이라고 다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또 다른 우여곡절을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옥 같은 타인을 만나게 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비극적 순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게 있어서 우여곡절은 프랑스에서(프랑스에 있기 때문에), 동양인 여성에게(동양인 여성이기 때문에) 생기는 사건이다. 마치 오이디푸스에게 행인을 죽이고 여왕과 결혼한 사실이 비극의 조건인 것처럼.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상의 굴곡에 당황하지만, 불행이든 행운이든 ‘우연한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은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여곡절, Peripeteia는 예상할 수 없으면서도 명백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맹세코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알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역설이다. 그래서 당신과 나 그리고 오이디푸스, 누구도 각자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자. 이 순간 내리는 선택이 미래의 우여곡절뿐만 아니라 찬란한 순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 했던 선택의 증거로서 지금 우리가 있지 않은가. 내게는 몇 년 전 프랑스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 그랬다. 원하던 철학 공부를 하며 마음의 풍요를 얻는 동시에 한국이라면 상식적이지 않은 위험에 매일 노출되는 그런 삶의 계기. 알지 못했던 불행과 행복을 자전거 페달을 밟듯이 번갈아 가며 마주했고, 결국엔 불행이 행복을 불러왔는지 그 반대인지 모호해졌다. 迂餘曲折 우여곡절, 이 기구한 단어처럼 어차피 뒤얽혀 복잡해질 삶이라면 적어도 내 선택으로 인해 불행해지고 싶다. 타인에게 떠밀린 인생에서 불행 앞에 떳떳할 수는 없을 테니까. 훗날 나의 굴곡에 대해 떠들더라도 기왕이면 ‘우여곡절 끝에’라는 말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개인의 삶이란 소포클레스의 비극보다 잔인해서, 두 눈을 파내고 추방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자유의지로 몇번이라도 다시 쓸 수 있는 개인의 서사는 ‘비극’이라 불리기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과 내가 그리는 궤적을 넘어

그날 82 매거진의 회의 주제는 ‘우여곡절’ 이었다. 여성 유학생들은 프랑스에서 겪었던 사건들을 차례차례 펼쳐 보였다. 우리 중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나 또한 그녀의 입을 빌려 말을 하는 듯했다. 다른 화자로 옮겨가며 확신은 점점 더 굳건해졌다.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과 장소, 상대방은 다를지언정 각자가 겪은 굴곡은 타지생활을 하는 동양인 여성 모두의 것이었다. 자리에 모인 누구도 타인의 경험을 스스로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지 못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기만이리라. 걸러지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나의 피부색, 나의 얼굴, 나의 억양, 나의 몸뚱어리. 악의는 없었다고 둘러대는 그들 앞에서 나의 분노는 자주 갈 곳을 잃었다. 우리가 겪는 희롱은 인종차별이라는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칭찬이라는 교묘한 변명으로 동양인 여성의 일상에 자리 잡는다. 그런데도 과연, 당신과 나의 우여곡절은 여전히 개별적인 것인가?

우여곡절이라는 단어는 굴곡진 움직임을 암시한다. 불어 Péripétie 의 어간에서도 방향을 바꾸는 운동임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변부를 뜻하는 Péri- 는 시간의 운동으로서 기간을 의미하는 période, 또는 파리를 둘러싼 외곽 순환도로의 이름 périphérique가 되기도 한다. 우여곡절을 우리가 그리는 생의 운동에서 흔적을 남기는 돌발적 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점들을 쭉 잇는다면 어떤 그림을 띄게 될까? 드물게 삶의 동선이 비슷한 모양을 띠는 타인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에 살고 있다거나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 등, 놀랍도록 닮은 당신과 나의 우여곡절은 같은 궤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내가 겪은 돌발적 사건들은 단순히 운이 없어서 일어난 개인적 경험이 아니다. 한 궤적을 나누는 모든 이들이 고백함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를 깨닫는 순간 개인의 불운은 사회의 문제로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우리가 연대해야만 하는 이유다.

하지만 우여곡절의 공유를 통한 연대는 한가지 맹점을 가진다. 같은 궤적을 가진 공동체의 목적은 ‘우리가 느끼는 부조리의 해소’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와 닮지 않은 타인의 우여곡절에도 공감할 수 있을까? 내 것이 아닌 고통에는 관음증적인 시선이 뒤따르곤 한다. 자연재해, 전쟁으로 인한 난민의 처참한 사진을 보거나 핍박받는 성 소수자의 진술을 듣고서야 그들의 고통을 떠올린다. 자극받지 않으면 손길을 내밀지 않는 시대다.

유대인 대학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에게 책임이 없었음을 주장했다. 그를 두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다. “당신의 죄는 순전한 사유의 불능성 sheer thoughtlessness이다.” 공감의 무능력이 아닌 사유의 불능성 inability to think임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감정에 호소하는 정도를 따지기보다 사유를 통해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 예를 들어, 난민이 불쌍해서 이민자를 수용하자고 주장하기보다는, 삶을 찾아 떠나온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옳기 때문에 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우여곡절에 대한 태도는 단순한 공감 능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양심의 호소를 넘어 지성에 되물을 때, 비로소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위한 선택이 되리라.

개인의 우여곡절은 스스로의 역사를 다시 쓸 때 긍정할 수 있다. 공동체의 우여곡절은 공감과 연대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리고 인류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옳음’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 모두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공동체가, 혹은 인류가 어떤 동선을 그리며 가고 있는지 섬세하게 느껴야만 한다. 그것이 삶의 굴곡에 대비하는 유일한 자세다. 달리는 기차 안에 있을 때는 직선으로 가는 듯이 느껴지지만, 지나온 선로와 지나갈 선로는 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02/12/2018

글/전진
파리에서 고양이 모시고 사는 철학도

이미지/김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