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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영화는 없다] 클레멘타인, 김두영, 2004




대학 시절 단편 영화를 몇 편 만들었다. 과제의 성격이 큰 작품들이었기에 학기 말이면 학과 내에서 작은 상영회를 열었고 교수님들과 학우들이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질문과 비평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나의 영화들은 늘 호평과 혹평이 적절히 섞인 무난한 것들이었다. 이제 막 꿈을 시작하는 학생들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순화된, 상처 주지 않는 범위 내의 평가였지만 그런데도 나는 그 시간이 끝나면 늘 괴롭고 의기소침해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나의 영화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나오지 않아서였다. 기술적 측면이나 대사에 대한 평가일수록 특히 짜증이 났다. 영화를 처음 만들어 본 나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 줄 몰랐고 더군다나 그 머릿속에 있는 것이 정리 마저 잘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책임한 긍정의 말로 촬영을 진행했다.


지금은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보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문제점이 있는 영화에 대해서는 맥주 한 잔과 함께 내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며 신나게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괴작’이라 칭해지며 영화를 본 사람 안 본 사람 모두에게 놀림거리가 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왠지 입을 다물게 된다. 주제넘은 생각일 수 있지만, 그 감독들은 내 새끼가 그렇게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굳이 누가 더 우습게 조롱 하나 내기하듯 글을 쓰는 평가자들로부터 어쩐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 역시 이 영화들이 잘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학부 시절 경험과 짠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타고난 주책맞음 때문에 이들에 대한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를 소비한 관객으로서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가 있음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작게나마 창작을 해본 입장에서 내 작품이 시간 낭비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무래도 가슴이 아프다. 아주 작지만 미소짓게 하는 단 한 장면이라도 있다면 적어도 그 장면이 흘러가는 몇 분 또는 몇 초는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고 변론하고 싶다.



김두영, <클레멘타인>, 2004

1. 제목 클레멘타인이 암시하듯 이 영화에서 부녀 관계는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심 소재이자 매우 중요한 장치이다. 감독은 끊임없이 애틋하고 끈끈한 둘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그중 초반 한 장면이 내게 큰 인상을 주었다. 바로 사랑이가 아빠에게 안마를 해주다가 칫솔을 가져다주는 장면. 사랑이가 아빠에게 가져다준 이 칫솔은 칫솔의 아랫부분을 누르면 칫솔모에 치약이 묻어 나오도록 설계되어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엽고 실용적인 칫솔이라니. 황급히 검색을 해보니 현재는 반려동물용으로만 시중에 나와있는 듯하다. 사랑이는 아빠에게 이 칫솔을 건네주기 전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아빠의 등을 안마해 주며 아빠가 언제 자러 간다고 말할까, 어떤 타이밍에 이 신기한 칫솔을 아빠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분명 설렜을 것이다. 이 때문에 종일 아빠를 기다렸겠지. 나는 초등학생 때 문화센터에서 마술을 배운 적이 있다. 그때 빈 주먹 속에서 색색의 스카프가 나오는 마술을 배웠는데 그것을 엄마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던 기억이 난다.
일부러 엄마 앞에서 장난을 치다가 손을 어딘가에 찧는 척을 하고 엄마가 손을 보자고 하는 순간 빈손에서 짜자잔 스카프를 꺼내는 마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장난을 치기 위해서, 또는 어떤 것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하다못해 깜짝 파티를 위해 숨어있을 때도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며 기다림의 순간을 즐길 때가 많다. 살면서 크고 작은 서프라이즈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사랑이 역시 이 칫솔을 발견한 순간부터 아빠를 떠올리고 아빠에게 보여줄 생각에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출처 불분명한 이 칫솔을 신기해하며 입에 물고 떠난다.


2. 민서의 남자친구 지훈은 민서가 다시 만난 첫사랑 승현에게 갈 수 있도록 그녀를 배려하며 놓아준다. 자, 다시. 나의 애인이 첫사랑을 우연히 만났고 그가 혼자 키우던 아이가 내 애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아이라고 한다. 물론 애인은 엄마의 계략으로 아이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현재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양육권 소송을 해 그 아이를 데려와 키우고자 한다. 물론 나와 제대로 된 상의는 없었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애인에게 직접 들었는데 그 방식은 나를 옆자리에 앉혀두고 술을 무진장 마시며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애인이 나를 앉혀두고 힘들어하며 술을 마시는 날들이 늘어간다. 나는 점점 소외감을 느낀다. 애인은 자신의 딸과 함께하고 싶어하고 그 딸은 아빠를 두고 엄마에게 갈 수 없다. 나는 이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애인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가. 참고로 애인에게 더 이상 나는 중요하지 않은 듯싶다. 현실에서는 물론 욕이라도 한 바가지해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지훈은 “그 사람도 민서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라는 대사를 남기며 조연답게 낄끼빠빠 그녀를 보내준다. 나는 늘 짠한 서브 남주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특히 한 때 연인이었다가 다시 등장한 옛사랑에 의해 패배하는 인물들, 가령 <러브 미 이프 유 대어>의 축구선수 세르게이 니모브 니모비치나,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첨밀밀>의 보스 표 형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게 가장 큰 여운을 남기는 존재

지훈은 사랑받는 서브남주의 기본 덕목인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비에 쫄딱 젖은 채 장미꽃을 들고 밤새 그녀를 기다리지도, 그녀를 구하러 목숨을 걸고 갱스터 소굴에 홀로 뛰어들지도 않는다. 그러니 민서의 평범한 남자친구이자 동료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지훈은 묵묵히 민서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녀의 의견을 따르고자 했다. 그것은 감히 의심이나 질투 따위가 비집을 틈조차 없는 견고한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누군가에게는 닭 다리를 양보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선물을 사주는 것이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윤리적인 범위 내에서) ‘잘못된’ 사랑의 표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 못된’ 사랑의 표현은 상황에 대한 고려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제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고 이는 결국 진심과 성의의 문제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며 진심으로 나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 영화는 나를 글 쓰게 하고 내 전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적어도 나에게는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지금 와서 다시 본 내 대학 시절 작품들은 더욱 처참하기 그지없다. 말로는 늘 재편집의 의사도 누군가에게 공개할 생각도 없다지만 사실 외장 하드를 꽁꽁 잘 싸매 프랑스까지 데려왔다. 욕을 해도 내가 하고 챙겨도 내가 챙기는 소중한 내 자식이니까.누구나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면 좋겠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작품을 좋아해 준다면 그걸로 됐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그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면 어떠랴. 덧붙이자면 <클레멘타인>의 주연이자 기획을 한 이동준 님은 2014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영화의 재개봉을 원한다고 밝힌 적 있다



03/12/2018
글/홍솔비 프랑스에서 영화와 인생을 공부하는 중. 실용적이지 않은 모든 학문에 대한 관심.
이미지/이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