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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랍인은 좀…



“난민?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아랍인은 좀….”

“난민들을 구제해야 하는 건 맞는데 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은 한국이 책임져야 해?”

“불쌍한 건 알겠는데 한국 내부의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저소득계층, 성차별 등 더 급한 문제가 많잖아.”


저는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 유학생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이 땅은 한국과는 달리 긴 이민의 역사를 가진 다민족 국가이지요.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파리에서 보낸 3년의 세월은 난민에 대한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험한 이민자’. 동양인 여자를 쉽게 보는 여성 혐오적 시선, 테러를 비롯한 범죄의 온상, 어린아이들까지 소매치기를 일삼는 등 한국인이 두려워하는 난민이란 이유 없는 걱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생생히 목격하고 살아내는 일상에 그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과연 그런 길을 걷도록 정해져 있었던 걸까요? 프랑스의 이슬람교도 이민자들이 종교에서 그런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닐 테지요. 세상에 악하게 살라고 부추기는 종교나 교육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면 왜 그들 중 일부는 테러를 저지르는 걸까요?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몰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요? 단일 민족이라는 환상 아래 살아가는 한국 내에서도 불평등이 존재하는 마당에, 프랑스에는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빈부격차와 교육수준에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지금 이곳의 젊은 프랑스 국적 아랍인들은 대부분 부모세대에서 프랑스에 이민을 왔던 사람들입니다. 모로코와 알제리 등 과거 프랑스 식민지는 약 130년 동안 식민통치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랍권 국가의 상대적 가난은 지금 우리가 동경하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의 선진국들이 착취해 낸 결과이지요. 그리고 생존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던 이민자들의 자식들이 아마 저와 당신이 본 나쁜 이슬람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들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기회나마 가져보았을까요? 그들의 삶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프랑스가 범죄자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범죄의 굴레에 가두어놓은 사회가 바로 프랑스라면요? 미래의 난민들을 범죄자로 규정하기 전에, 한국은 어떻게 그들에게 교육과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요? 시민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주기 이전에 잠재적 골칫거리로 치부하기. 난민에 대한 첫 번째 오류입니다.

프랑스는 속죄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나긴 식민통치 끝에 생겨난 이민자들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들 탓이 크지요. 서구가 이들을 거부한다면 자신들이 역사에 새긴 과오에 눈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은 식민지, 전쟁에 있어서 무고하다며 책임을 피하는 이들의 논리 또한 이해가 갑니다. 중동의 내전과 우리나라는 상관이 없다는 변명 뒤에 숨는 거지요. 하지만 과연 한국인이라고 세계의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삼성 핸드폰을 쓰는 이슬람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살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오는 난민은 나쁜 아랍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요. 평생 마주할 일 없을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까지 한국 기업의 하청 노동자, 미래의 소비자로 여기는 범지구적 시장경제 시대에서 우리는 더이상 떳떳하지 못합니다. 이민자 문제는 단순히 서구와 제 3세계 사이의 오랜 모순이 아닙니다.

터놓고 말해서, 한국이 난민은 물론 환경보호처럼 세계적 고민에 귀 기울인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란 외국에 한국의 위상을 어떻게 떨칠 것 인가에 대한 문제였을 뿐, 세계시민으로서 지구촌 문제에 얼마나 책임을 질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지요.


세계 최대 아동 송출국 중 하나인 한국이 반대로 입양아를 들이는 일이 드문 것처럼요. 인권과 환경을 비롯한 윤리적 고민에 있어 한국의 무지는 이번 난민 이슈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근본 없는 외국인을 한국 땅에 들이기 싫다고 외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쩜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이요! 난민은 전쟁과 박해를 피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살아서 도착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떠나온 겁니다. 그런 이들을 두고 어떻게 그리도 당당하게 난민에 반대한다고 외칠 수 있나요? 프랑스에도 물론 난민에 반대하는 극우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그 의견이 부끄러워해야 할 발언임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판단에 반하는 의견을 자신 있게 내뱉지 못합니다.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을 죽음의 길로 내몰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은 난민이라는 타인을 윤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경험이 없지요. ‘그들이 죽건 살건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라는 무관심은 공감 능력의 결여와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난민에 대한 두 번째 오류는 사유와 공감의 불능성에서 비롯됩니다.

누군가는 ‘국민이 먼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저소득층, 탈북자들의 여건을 책임지는 등 자국 문제도 충분히 많고 아직 외부 문제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요. 난민을 받아들일 예산도 인프라도 없는 현실은 처참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국가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320만 명 이상을 수용하고 있는 터키, 다음으로 요르단, 레바논, 파키스탄 등입니다. 선진국의 엄살과는 달리 공정한 책임 분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요. 이들 나라도 내부에 걱정거리가 없어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난민 수용은 준비가 될 때까지 미룰 일이 아니며 관리할 시스템이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준비되어야 수용 가능하다는 세 번째 오류입니다. 허점을 악용할 수 없게끔 견고한 법망과 더 많은 관리자가 필요할 겁니다. 지금 난민에게 재정 지원을 하면 저소득층이 대신 어려움에 처하는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맙시다. 난민 수용을 위한 시스템보다 시급한 것은 그들에 대한 인식과 인권에 대한 공정한 접근입니다.

우리는 한국인이기 이전에 세계시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많이 늦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수는 앞으로 걷잡을 수 없을 거예요.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국민의 선택과는 상관없을 정도로요. 그렇다면 프랑스를 비롯해 난민문제로 앓는 선진국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지 맙시다.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 사람답게 살 기회를 동등하게 주어야 합니다. 프랑스처럼 백인과 유색인종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재생산하지 맙시다. 대물림되는 분노로 인한 범죄는 그런 사회에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받은 분노와 혐오를 더 약한 이에게 표출하기, 우리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봐왔으니까요. 난민이라 칭하는 이들이 정말로 우려한 결과를 몰고 올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겠지요. 그러니 다시 한번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봅시다. 안전한 곳을 찾아 고향에서 도망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를.



24/12/2018
글/전진
파리에서 고양이 모시고 사는 철학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