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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권리에 대하여’




16/01/2019  
글/김새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사회과학부 학사 과정
이미지/이화영






프랑스 혁명 당시 만들어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미국과 영국의 권리 장전은 세계 인권 선언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의 인권 관련 법률, 헌법 및 제도의 초안이 된다. 이 역사적인 문건들은 대부분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에 관한 규칙을 열거하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대개의 초창기 ‘인권 선언문’들이 ‘모든 인간은…’으로 시작하는 문장들로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인류, 심지어 이 선언문들의 작성자들이 대강의 동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말이다. 이와 같은 문건들의 ‘진짜진짜최종.pdf’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인권 선언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존엄성에 도달하기는 요원해 보인다는 것 역시.

처음 민주주의에 대해 배울 때 대다수 교과서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소개하며 초입을 연다.
Democracy-Democratie-의 어원 역시 그리스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상식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모든 시민’에 여자와 외국인, 노예,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사회 계약설로 유명한 홉스, 로크, 루소, 권력분립을 주장한 몽테스키외, 사상사에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럽의 백인 남자들 얘기를 배울 때도 비슷하다. 신분제도를 긍정하기도 하고, 인종주의를 긍정하기도 하며, 대체로 그들에게 인간이란 성인 백인 남성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었을 때 현대인의 시각에서 ‘인간의 권리’를 말하는 문건들이 너무나 많은 인간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발표된 이후에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재개했고, 미국의 권리장전 이후에도 노예제도를 둘러싼 대표적 갈등인 남북전쟁이 있었으며, 영국의 권리장전 이후로도 동인도 회사는 건재했다. 그러나 이런 문건들을 작성한 백인 남성 사상가들이 ‘인간’으로 여기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각종 ‘인권 선언’들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반쪽짜리 ‘인권’ 선언들이 역사적 의의가 있게 된 것은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세워진 편협한 벽에 도전한 사람들 덕이다. 인간이 성인 남성만을 의미하는 이상 그 뒤에 평등이나 자유 같은 단어들은 가치를 잃게 되니까. 다시 말해, 인간의 권리와 관련된 근현대의 수많은 법률과 문장들은 남성의 권리였다. 물론 더 한정적으로 유산 계급 남성일 때도 있었고, 제국주의 국가의 남성일 때도 있었고, 그냥 백인 남성일 때도 있었지만 모두 남성의 권리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많은 나라가 인간, 국민 혹은 시민의 보편 권리 대신 여성, 아동, 외국인 등 특정 인간 집단의 권리에 대한 법률이나 선언을 제창할 때마다 많은 사람-남자-들이 그것은 역차별이라고 말한다. 여권을 위한 제도와 법률을 예로 들며 여성 상위시대라고 말한다. 인간의 권리를 논하기 시작한 이래 남성이 언급되지 않은 권리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로 여성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성적 자기 결정권’ 같은 권리가 있다.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 같은 것이 이런 권리에 기인한다. 최근엔 남성 성폭력 피해자에 관한 가시화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와 같은 권리는 여전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된다. 한국에서는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한다고 판단해 불법인 낙태 시술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대표적 신체에 관한 권리로 보장받는 제도 중 하나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여성의 권리(그 외 소수자의 권리 역시)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할 때는 자주 ‘특권’ ‘역차별’ 논란이 따라붙는다. ‘남성’, ‘비장애인’, ‘성년’, ‘이성애자’, ‘비외국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논란은 쿨타임이 차면 돌아오는 ‘페미-니즘’ 논란과도 비슷한데, ‘모든 인간은 평등한데 왜 굳이 ‘페미(femi-)’라는 접두사를 사용하느냐!’, ‘왜 휴머니즘이라고 하지 않느냐!’라는 지적과 닮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수많은 ‘인권 선언’에서 ‘인간’이 지극히 선별적인 집단을 의미했듯이 여성, 흑인 운동을 비롯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에 관한 투쟁은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슬쩍 여성을 끼워주는 듯한 ‘휴머니즘’은 본질성을 잃는다.
많은 현대 국가에서는 이제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사실 ‘남성’의 권리에 관한 법률은 꽤 많았다. 남성을 인간의 디폴트로 두는 인권에 관한 법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남성만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하는 법률 말이다. 투표권, 재산소유권, 양육권 등등 남성에게만 속하는 권리를 명시한 옛 법률들이 그 예다. 까마득한 옛날얘기 같지만, 한국 역시 호주제 폐지나 모친의 성을 쓸 수 있게 하는 법률이 통과된 건 최근 일이다. 실제로 남편이나 집안의 남성에게 가족 구성원의 인권과 관련된 구속력을 보장하는 법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여기서 ‘남성’의 권리를 위한 법률, 제도와 ‘여성’의 권리를 위한 법률, 제도의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초창기 ‘남성’을 인간으로 전제한 인권선언문들로 시작해 ‘남성의 권리’는 성차별에 기인한 ‘특권’이었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논의되는 법률과 제도들은 성차별을 방지하거나 그에 따른 피해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성격을 띤다. 왜 ‘남성’의 신체 자기 결정권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가? 고문이나 부당한 구속에 대한 자유는 ‘인간’의 신체 자기 결정권으로 충분히 근거되기 때문이다. 반면 낙태, 매매혼, 탈코르셋과 같은 의제는 ‘여성’의 신체 자기 결정권을 근거로 한다.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으로 퉁쳐질 수 없는 이유, 여성의 권리를 단순히 인권으로 뭉뚱그려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전히 남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고 여성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