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pé82           



660개의 동그라미







서울

완벽하게 닫히지 않은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새고 있었다. 조용한 방에서는 내 숨소리와 정적만이 번갈아 가며 들렸다. 일정하게 반복되던 그 박자가 헝클어졌을 때 나는 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째깍째깍

시계의 끊이지 않는 초침 소리가 나에게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 혹은 낮과 밤이 아닌, 24개의 정확히 규칙적인 간격에 의해 나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초조해진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귀를 틀어막는다. 이내 꿈의 연장선과도 같은 공상으로 빠져든 나는 시계가 지배하는 세계와 단절되어 절대적인 안정감을 느낀다. 언젠가부터 세상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적어졌다는 사실에도 이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루에도 책 한 권으로 엮일 만큼 많은 생각을 하는 나로서는,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 대부분은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줄 그어지는 것을 보며, 단 몇 줄로 요약 될 대단치 않은 생각들에 나는 왜 이리 많은 시간을 허비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나라는 사람의 사고체계는 매우 비효율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나는 부팅하는 데만 대 여섯 시간이 걸리는 고물 머리로 살고 있다. 아마 그것은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과 연관되어, 바꿔야 하는 시기를 놓쳐버린 전자기기를 너무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는 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도 내 딴에는 정이 들어서 쉽게 내다 버리지도 못하고 나름대로 앤틱한 멋에 취해 살고 있는 것이다.

째깍째깍

집에 있는 반찬을 대충 밥공기에 덜어내어 밤 동안 아무도 앉지 않아 차갑게 긴장된 가죽 소파 위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집어 든다. TV 전원이 들어오는 소리가 엉덩이 밑의 차가운 감촉만큼이나 찌릿하게 몸을 타고 돈다. 케이블 채널에서 새로운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었다. 주인공을 어떤 시트콤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이번 드라마에서 잘 어울리는 역할을 맡았다. 배역의 이름이 ‘호구’였다. 하는 짓도 호구 중 호구인 그는 회가 갈수록 점점 더 멋있어질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채널을 붙들고 있게 된다. 로맨틱 장르에서는 남자주인공이 항상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실의 연애는 그와는 반대로 처음이 가장 화려하다. 황홀함으로 치장한 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처음 얼마간이 전부이다. 그 황홀했던 시간들을 머릿속에서 되감기 하며 현재의 연애를 때우고 있는 기분이다. ‘내 사랑은 다를 거야’라는 맹목적인 기대감으로 나는 매일 멋대로 상대에게 기회를 주곤 한다.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봐. 제발 증명해줘. 하지만 갈수록 더 많은 사랑을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먹이가 필요하다. 정열, 욕망, 긴장감, 안정, 낭만, 충동적 결정, 약속, 진심, 사소한 질투, 유머… 불행히도 나의 사랑은 대식가이다. 이 사랑을 먹이려고 나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


우정에 있어서도 나는 우등생이 아니었다. 우정이라는 것은 식물 기르기와도 같아서 이틀쯤은 괜찮겠지 하고 물을 주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 버린다. 확실히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선인장 정도는 키울 수 있어>하고 사 온 세 개의 선인장 묘목은 결국 차례로 말라가며 나를 괴롭게 하였다. 사막의 퍽퍽한 모래 속에도 발톱을 단단히 세우고 땅을 움켜잡으며 지나가는 비를 구걸해 살아남는 선인장이, 풍족한 빛과 적당한 물이 보장되는 안락한 내 보금자리에서는 죽어 나가는 것이다. 결국 나는 선인장까지 미워하게 되고 만다. 무엇을 키우기에 이렇게 서투른 손이 또 있을까. 어린 시절, 내가 생각하기에 내 몸이 선물로 받은 강아지만큼 작았던 시절에 나는 두 번이나 기르던 강아지를 친척 집에 넘겨주었다. 내가 아직 책임감의 무게를 알기에는 너무 미숙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엄마의 판단이었기 때문에 나는 발을 있는 대로 구르고 목이 쉬어라 울다가 결국에는 내 방에 들어가 그 당시 내게 최고로 적대적인 의사표시라 할 수 있는 <문 잠그기>를 하였다. 동그란 손잡이의 가운데 솟아있는 그 단추는 오직 방의 주인인 나만이 누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나의 엄마가 생각하기에 갓 7살이 된 여자아이가 고안해 내기에는 너무나도 폭력적인 행동이었다. 달칵하는 그 도전적인 소리가 30평 남짓 되는 집 안에 울려 퍼지자, 엄마의 힘이 실린 발걸음이 내 방 앞까지 이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쾅쾅쾅!>. <쾅쾅쾅>! 천둥처럼 온 벽을 타고 진동하던 그 소리에 내 생에 첫 반항은 가차 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최초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나의 반항의 첫 싹을 구둣발의 뒤축으로 사정없이 세 번 내리찍은 것이다. 나는 굴욕감을 느끼며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엄마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그 뒤로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문틈을 조그맣게 벌려놓는 것은, 그때 보았던 엄마의 슬픈 얼굴 때문이었을까? 그 얼굴에는 처음으로 당신에게 단절의 벽을 세운 딸에 대한 서글픈 배신감과 분노의 표정이 뚜렷이 그려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단순히 <쾅쾅쾅!>하는 그 소리가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혼이 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아지가 사라진 것에 대한 나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내가 애정을 품고 있던 우리 집 빨간 티코가 하루아침에 하얀색 크레도스로 바뀌어 버렸을 때나, 베란다 너머로 내가 매년 첫눈이 쌓였는지를 확인하던 건너편 집의 지붕이 허물어졌을 때 내가 한동안 울적해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지붕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위에 쌓인 눈이 사라진다는 의미였고, 눈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위의 겨울의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째깍째깍째깍

해가 떠 있는 동안 시간은 더 빨리 간다. 해가 떠 있을 때가 노동의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듯 그도 더 바쁘게 일하나 보다. 사람들. 집 밖으로 나와 살갗으로 부딪히는 순간 나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국에 나와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유할 수 없는 정서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너무 다른 것뿐이라고 암시를 한다. 이 암시의 힘은 대단해서 나를 툭 치고 그냥 지나치는 저 사람, 버스에 오를 때 뒤에서 밀어대는 사람, 짐이 많은 사람이 뒤에 따라와도 자신만 문틈으로 쏙 사라지는 사람을 보고도 다정하게 웃어 보일 수 있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해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째깍째깍째깍째깍

내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면 무엇이든 이보다는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두려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형체를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의 눈, 코, 입, 얼굴 윤곽이 잡혀가고 결국 그의 눈썹의 각도, 속눈썹의 길이, 휜 콧대, 앞니의 비틀린 정도, 눈동자의 색, 그리고 그 위로 드리운 비스듬한 어둠을 보게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의 신앙은 종교적인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신을 약점이 없는 부모님, 나의 절대적 보호자로 받아들였다. 두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무엇이 두렵냐고. 나는 외롭다는 것이 두렵다. 외로움은 내가 지금까지 적용해 왔던 모든 삶의 문법들을 무너뜨린다. 외로움이라는 건 간단하다.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는 내몰리듯 낯선 사람들과 접촉한다.



째 깍

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매번 오로지 나의 욕망에만 집중할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비겁하다 싶을 정도로 겁이 많은 성향 탓에 비난받는 것이 무서워 실행하지 못한 일이 여럿 있다.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내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곳에 나는 없었다.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체스판 위 졸병의 움직임처럼 규칙에 따라 한정된 공간만을 전진 후진할 뿐이었다.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글/임솔지

이미지/이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