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pé82           


The Noonday Demon





부식을 체험하는 것, 거의 날마다 내리는 비의 파괴에 노출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연약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고 자신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강풍에 날려 가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을 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감정의 녹이 더 많이 슨다. 우울증은 생기를 빼앗고 하루하루를 뿌연 안개로 덮고 일상적인 행동들을 힘겹게
만든다.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고 망상에 시달리게 한다.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지난여름 한국은 찌는 듯이 더웠다. 채소코너 채소가 된 듯한 프랑스의 추위 속에서도 지난여름 한국의 더위는 생생하다. 그 더운 아스팔트 길을 걸어가 차갑게 에어컨을 틀어놓은 카페에서 매일매일 우울증에 대한 책을 읽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그 책을 그때 읽은 것은 다행이었다. 더위는 몹시 몸을 무기력하게 했으나 매일매일 나의 노동 없이 지어진 밥을 먹었고 걱정은 팔천 킬로미터 건너 땅에다 던져놓은 참이었다. 분수 넘칠 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심장을 죄어오는 이유 모를 고통이나 길을 걸으면서 상대 없이 타오르는 분노, 이유도 없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이 시큰거리는 눈 같은 감각들은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720 페이지가 넘는 우울증에 관한 방대한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일 매일 노트북과 책을 챙겨 들고 차가운 밀크티를 마시면서 담요를 덮고 에어컨을 쐬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열심히 옮겨 적었다. 잊은 것만 같은 고통도, 주체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다시 돌아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를 위해 정오에 나타나는 괴물에 대해서 열심히 알아두어야 했다. 괴물에 맞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그 고통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 따위 없는 나 스스로가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괴물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희진은 <한낮의 우울>에 대해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몇십 년간은 우울증 관련 저술에 도전하는 이가 드물었으리라.’ 과연 그랬다. 책의 저자인 앤드류 솔로몬이 우울증 환자 여야만 완성할 수 있는 저술인데, 우울증 환자가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실하고 탁월했다. 우울증은 내가 끊임없이 마주 보는 거울 같았고 하루 종일 떠올리는 때도 많은 주제였지만 더 이상 내가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전부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훌륭한 문장으로 쓸 엄두도 낼 수 없을 수준으로. 그런데도 결국 우울증에 대한 글을 쓰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참을 빈 페이지를 띄워놓고 지난여름 열심히 적어둔 메모를 읽고 또 읽었다. 이 파일을 그냥 편집해서 보내버릴까, 고민했다. 그보다 더 진실을 정확하게 전달할 능력이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나의 우울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는 너무 많이 했다. 나는 나의 우울증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게 이해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우울증에 대한 생각을 멈추어서 누군가 나의 우울증을 이해하길 간절히 바라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만 우울증을 덜 인식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현실은 뚜렷하다. 나는 하루 세 번 항불안제와 한 번 항우울제를 먹는다. 그 약들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약을 최근에 두 배 정도 늘려야 했는데, 기능이 저하된 뇌를 억지로 구슬려서 더듬더듬 프랑스어로 증상을 설명하다가 의사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 나는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학교에 갈 때마다 공황 발작이 와서 약을 삼키고 등교해야 하는데 엄마가 뭘 아냐며 악을 쓰고 울었다. 내가 말한 적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고 지금 하는 짓이 얼마나 한심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기분 장애는 내가 인지할 수 없는 과거에서부터 몇 번이나 크게 내 발목을 잡아 왔고, 아슬아슬하게 포장한 일상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면 다시 나를 넘어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유학 생활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한결같이 우울증이었다. 그걸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언제부터 내가 우울증 환자였는지도 모르는데, 우울증이 아닌 나를 어떻게 구분해서 따로 떼어 놓는단 말인가?

우울증은 첫 프랑스 대학 생활의 나를 일 년 동안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낯선 도시에서 18 제곱미터 방에서 폐인처럼 살도록 했다. 2주 동안 지독한 독감을 앓은 뒤 찾아온 우울 삽화는 거의 끝마쳤던 학년을 말아먹고 또다시 유급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멀쩡하게 생겨서 크게 부족할 것도 없는 내가 무엇보다 왜 남들보다 더 많은 실패를 반복하는지 아무에게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우울증에 대해 생각한다. 약이 증상을 억누르고 있을 때조차 그러지 못했을 때 내가 저지른 일들의 결과를 감내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라는 주제를 받아들였을 때 좀 더 멋지게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나는 한 차례 또다시 가벼운 에피소드를 겪어낸 후고 그동안 미뤄진 일들을 해결하느라 눈알이 돌아갈 지경이다. 무기력, 수면 장애, 집중력 장애, 충동 구매 … 셀 수 없이 많은 증상을 동반하는 에피소드가 지나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건 그만큼 주변에 사람도 있었고, 지원도 있었으며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겨운 병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만큼 운이 나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버틸 만큼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인 나의 유학 실패기다. 결과가 어찌됐든 지금까지는 처참하게도 우울증이 승세를 보이고, 그래서 내 유학은 성공기가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인 유학생들을 만나면 우스갯소리처럼 프랑스 유학생들은 다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끈질긴 운과의 싸움에서 버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안다. 당사자들이라면 더 풀어놓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수많은 이유들로 외로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래서 이 글을 썼다. 살짝 건드리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고 낯선 언어를 견디는 이들에게. 여전히 나만 남들 다 쉽게 해내는 일이 이렇게 힘든가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연인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비슷한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50페이지에 달하는 <한낮의 우울>의 인용 메모에서 골라낸 한 부분을 보내드리고 싶다. 우울증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그 괴물에 맞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실망하는지를 길게 늘어놓던 이 책의 마지막 장의 몇 문장이다. 마지막 챕터의 이름은 ‘희망’이다.

«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삶과 나는 서로 반대 입장에서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도 영원히 결합되어 있는 듯하다.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은 슬플 때조차도 생기에 차 있다. 어쩌면 내년쯤 나는 다시 무너질 수도 있으며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난 그런 감정들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고 그 이유들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날마다 (가끔은 투계처럼 용감하게, 가끔은 그 순간의 논리에 반하여) 살아 있기로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문 기쁨이 아닐까? »

20/11/2018

글/김새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사회과학부 학사 과정 중.

이미지/이화영